한국서바스

밥상 이야기

강재일 2010-03-18 (목) 21:10 추천:0 조회:884 59.xxx.184

언제적인가?
기억 저편, 아련한 시절에.
홀로 생활하면서 손수 밥을 짓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살 즈음, 그 팔팔함을 주체치 못하고 무술 수련원에서 자취를 하며 지내던 시절.
양 다리에 납덩이를 넣은 각반을 차고 약 이십리 길을 걸어서 통학을 했다.
종일 납주머니를 매달고 다니다 그걸 푸는 순간,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치솟는 느낌이 들곤 했었지.
그런 느낌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저녁밥을 짓기 위해 수도물을 길어 날라야 했는데.
바께스 두 개에 물을 가득 채우고는 구름처럼 가볍게 달리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걸 두려워해서 더 빨리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
틀림없이 그랬을 성 싶다.
그 시절엔 사내자식이 밥을 짓는다는 게 너무나 수치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쩌다 낯 선 여학생과 눈이라도 마주칠양이면 바께쓰를 버리고 도망쳐 버리고 싶었으니까.
아무튼 난 무척 부끄럼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서 30대 후반.
한참 잘 나가던 시절에 뜻하지 않은 일로 엄청 힘든 나날을 맞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만큼 매일매일의 삶은 얄긋한 내 자존심을 갉아 대었고,
그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난 결국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기를 작심한 날.
더 이상 추락할 미래를 상상조차 하기 싫어 아무 생각도 없이 차를 몰았다.
어디쯤 달렸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내 육신이 서 있는 곳은 지리산의 어느 자락이었다.
무술 수련차 몇 번인가 찾았던 심산 계곡.
난 그 계곡의 무상 앞에 또 한번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조차 거부해 버린 젊음.
아! 이 젊음을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모든 걸 상실 해 버린 이 처절한 젊음을.
그날 이후 일주일 가량을 의식없이 살았다.
내가 다시 직장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 일주일이 지난 뒤였으니까.
아무도 나의 잠적을 궁금해 하지 않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쿡쿡 울음을 눌러 삼키는 날이 많아지면서 난 차츰 '내가 아닌 나'로 변해져 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스스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나면 붓을 들었다.
그러다 지치면 차를 마시고, 차를 마시면서 명상으로 나를 다잡았다.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잦아지면서 가족들과의 접촉도 소원해 졌다.
살기위해 마신 술을 죽도록 마시던 적도 있었다.
남 보기엔 지칠 이유도, 힘들 까닭도 전혀없는 삶인데도 난 스스로 힘들고 괴로웠던 것이다.
올림픽이 열리던 다음 해던가.
남해에서 혼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직장을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시작한 독신 생활.
난 혼자 자취를 하기로 하고 시골 구석진 곳에 방을 구했다.
노 부부가 기거하는 윗채와 마주 한, 방 한칸의 아랫채.
내가 기거하는 그 방 옆엔 소마굿간이 있었다.
밤이면 소가 내품는 기다란 하품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곤 하였다.
난 종종 끼니를 걸렀다.
밥 하기가 싫어서였다.
아침에 해 놓은 밥을 다음 날 아침까지 먹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며칠이 지난 밥솥에 벌겋게 색갈이 변해진 밥이 다닥다닥 누렁지처럼 오그라 붙어 있을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럴때면 지금의 이 궁상스런 삶이 싫어 내 자신이 미워지곤 했다.
어쩌다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태어나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어느 한가지 부러운 것없이 호강만 하며 살아 왔던 내가.
그런 생각에 젖어 살게 되자 자연스럽게 생활은 더욱 어긋났다.
그러던 어느 날.
한가지 꾀가 생겼다.
내가 또 다른 나에게 밥상을 차려 주는 묘안이.
그러니까, 내 안에 꼬물거리는 그 잘난체 하고 싶은 나에게 현재의 보잘 것없는 내가 밥 시중을 들어 주는 것이다.
"ㅇㅇ님, 식사 하시죠."
"알았네!"
밥상을 차려놓고 혼자하는 퍼포먼스다.
'현재의 나'가 잘난 체 만하고 살았던 '과거의 나'에게 식사하기를 청하는.
그러면 그 잘난 체 만하고 살던 '과거의 나'가 거드럼을 피우며 밥상머리 방석위에 앉는다.
식사가 끝나면 또 다른 의식이 있다.
"잘 먹었네 그려."
"예 감사합니다. 잘 드셔 주셔서."
하면서 숭늉까지 대령한다.
이런 모습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또 다른 '나'가 있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나'.

지천명을 넘기고 이순을 눈 앞에 둔 지금.
난 거의 밥상을 차리지 않는다.
차리는 번로움이 싫어서라기 보다 선 채로 먹는 밥이 훨씬 능률적이란 생각에서다.
우선 상차림이 간략하다.
냉장고에서 꺼낸 여러가지 찬을 커다란 평식기에 담으면 되니까.
그러고는 밥과 함께 그것들을 들고 다니면서 먹는다.
먹는 중에도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설령 음악을 들으면서 박자를 맞춘다거나, 문득 솟아나는 생각을 메모한다거나 하는.
그 뿐이 아니다.
입 안의 것이 목에 다 넘어 갈때까지 걷기 운동을 겸한다.
누군가가 있으면 도무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지만 혼자니까 가능하다.
먹고나서의 마무리도 간단하다.
커다란 평식기 하나만 씻어 헹구면 끝이다.
예전의 방식이나 지금의 방식이나 모두가 다 내가 지어낸 '내 방식'이다.
그래서 지겹지가 않은 것이다.
이런 나를 눈치 챈 아내도 제자도 제발 그러지 말기를 당부하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무엇이 되고 싶어 한다.
그 무엇이 되고 싶은 욕망때문에 '할 짓' '안 할 짓'을 구분 않고 막해 댄다.
정작 무엇이 되고 싶은 사람은 '할 짓'을 안 할 수 있어야 하고, '안 할 짓'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의 나.
죽고 싶을만큼의 절망도, 가슴 터질듯한 희열도 없다.
마냥 담담하게 살아 갈 뿐.
그저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일상적 즐거움에 젖어 들 따름이다.
난 이런 내가 좋다.
남의 이목에 휘둘리며 살았던 '과거의 나'를 빗장 속에 가두고,
대 자유인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참 나'를 찾아 오늘도 긴 호흡을 가다듬는 그러한 내가.
남의 눈엔 보잘것 없지만 그래도 자잔한 즐거움에 빠질 줄 아는.
바보같지만 천진한 내가.
걸어 다니면서 밥을 먹는 막돼먹은 놈이라고 핀잔을 들을지언정,
정말로 난,
이런 내가 좋다.

2010년 3월 18일 나무의 날

[출처] 원언재(垣彦齋) 일기...70 (밥 상 이야기)|작성자 선비

Heung-sook,Lee 2010-03-22 13:39	나를 보는 또다른 나~~ 어느 경지까지 가야 그리될까요? 언제부터인가 제가 나에게 다시 물어보는 습관이 생겨났습니다. 타자에게 할 말을 나자신에게 던져봅니다. 들어서 썩 괜찮은 말이면 조심해서 상대와 커뮤니케이션합니다. 좋은 말 찾기가 어려운 것은 수양이 덜 된탓이겠지요. 첫 직장에서는 많은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듣기만해도 되었지요. 그러다 일정 책임을 맡으면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있는 말을 쉽게 했었지요. 생각한 말을 그냥 하다 상처도 받고 다투기도 했었습니다. 이제는 보직없는 정년을 앞둔 선배들을 직장 부하로 삼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부하직원과 나이든 선배, 조직을 위해선 동력이 필요하고 추진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능력, 성격, 사명감, 종교등등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강교수님처럼 또다른 나를 하나 탄생시키고 있습니다. 본연의 나는 집에두고 출근하면서 항상 생각해 오던 화두, 교수님에게 배웁니다. 산청에서의 1/4분기 늦은 만남 감사합니다. 석호씨 가족들 모두 잘 가셨는지요? 곧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ijaHong 2010-04-01 15:32	. 우연히도 생전에 저의 친조부와 흡사한 외모의 법정스님은 친조부의 기일을 하루앞두고 입적하셨습니다. 평소 법정스님이 왠지 친근하게느껴지고 참으로 존경하는 분이 셨는데.. 스님의 입적소식을 접한 많은사람들이 슬퍼한것처럼 저도 한동안 우울한 마음 으로 3월을 보냈답니다. 그리고 문득 법정 스님과 강교수님이 크로즈 업 되었지요. 무엇인가 중요한것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남기신 분들께 다시금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