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지회(하동)모임을 마치고...

강  재  일

정해년 시월 마지막 토요일.

운 좋으면 길가에 널 부러진 ‘가을이라도 줍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맘은 일찍부터 설레었다. 실은 가을맞이 나들이라기보다 하동에서 치러 질 ‘서바스 경남 식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지만 모처럼 마련한 귀한 시간이라 짜투리 쨤 일망정 허투루 보내기가 싫었던 것이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한다는 가을을 편안하게 앉은 자리에서 맞이하기에는 어딘가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주에서 서둘러 볼 일을 마치고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하동으로 향했다. 바삐 설친 덕분으로 넉넉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보상(報償)으로 받으면서.

“햐! 저어기 좀 보렴.”

쑥부쟁이랑 산국(山菊)이 서로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 뒤로 갖가지 나무들의 품새 자랑이 한창이다. 꽃잎을 떨궈 낸 을씨년스런 코스모스. 풍성한 태양빛을 머금고 각색의 아름다움을 발하는 이름 모를 요초(妖草), 기화(琪花,고운 꽃)들. 며칠 전 안개 속에서 생기 없던 태양이 왜 그토록 창백한 모습이었든가를 미루어 알 것 같았다. 저토록 아름다운 빛깔을 선뜻 내어 주었기에 태양은 그렇게 핏기 없는 낯빛을 하고 있었던 거였구나.

성급한 가을은 섬진강에서도 넘실거렸다. 화개로 오르는 길섶은 온통 가을이 그려놓은 거대한 한 폭의 산수화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나의 출석이 염려 되었던 ‘이(흥숙)’지부장의 전화 벨 소리에 산수화에 빠져 버렸던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였다. [화개장터]. 그 곳엔 먼저 온 회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낯이 익고 설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바스 멤버’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이미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생면부지의 얼굴까지 옛 정인(情人)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으니.

까닭 없이 반가웠다. 취미를 같이 한다는 건 ‘유유상종(類類相從)’의 기본 국량(度)이 아닌가. 잠시의 통성명으로 하나 된 일행은 홈 스테이에 들어갔다. ‘서바스 모임’의 특징이 이런 것일까. 거(居)하는 곳마다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를 만들고, 곤륜산의 서왕모(西王母)까지 만들어 대니 말이다. 미꾸라지와 은어(銀魚)튀김도 모자라 쇠고기에 송이버섯까지. 아마도 이런 성찬을 마련해 주신 ‘류영자’회원께서는 오늘 하루를 위해 남은 날들은 머슴처럼 살아야 하리라. 어디 그 뿐이랴. 년대를 헤아리지 못할 화끈한 ‘더덕 주’는 아내의 병간호에 여념 없을 ‘서영교’회원의 마음 그 자체였다. 모두가 하나 되어 펼쳐진 포트럭 파티. 보름을 훨씬 지난 둥그런 달이 동산으로 기웃대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우리는 군밤과 함께 ‘화개의 밤’을 후식으로 질겅거렸다.

남다르게 사람을 배려 할 줄 아는 '이 지부장' 덕분에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했기에 새벽 산책을 나설 수 있었다. 화개계곡의 새벽안개. 이런 광경을 두고 선경(仙境)이라 일렀겠지. 멀찌막이 ‘이 선생’ 내외의 다정한 모습이 보인다. 부지런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는 신의 축복을 그들은 신명나게 즐기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도가(道家)적 삶으로 일상(日常)의 틀에 사로잡힌 허영(虛榮)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홍송곤’회원을 찾아 보기로 했다.

구비 진 산허리를 돌아 돌아서 찾아 든 곳. 지리산 중산리 -- 마을. 좁게 트인 농로를 따라 구불텅 거리며 차를 세우자 얼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삽살개(?) 두 마리가 객을 맞는다. 눈을 들어 위를 보니 아슴하게 사람들이 보인다. 홍송곤 부부. 그리고 ‘귀농’, ‘귀산’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들. 그들이 한 식구 되어 허심(虛心)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부를 그려 낼만큼 어울리는 우리 글귀(문구)가 없다. 표현 불가. 그러나 느낌은 온다. 산. 아니 바위. 아니다, 물일까? 혹시 어제 봤던 달빛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들은 ‘알 듯 모를 듯’이다. 느낌을 문자로 다 표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노벨 문학상’ 쯤이야 식은 죽 먹기 일 테지. 그는 침묵이었다. 가만히 뒷줄에 서서 존재조차 숨길 줄 아는.

모름지기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때로는 아만에 빠져 허우적이던 나에게 그의 소리 없는 가르침은 혹독한 ‘채찍’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람이리라. 숲에 머물렀다가 들판으로 에돌아 나와 상큼하게 더위를 식혀 주던 한 여름날의 싱그러운 바람. 그러면서 그는 물이 되곤 하는 것이다. 버티고 서 있는 바위를 지청구 않으면서 슬며시 비켜 나갈 줄 아는 지혜로운 물. 그 물의 덕(德)됨이야 노자(老子)에서 익히 듣지 않았던가. 상선약수(上善若水)!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림자’일 지도 모르겠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람’의 실체를 보지 못하다가 그림자를 본 후에야 비로소 ‘사람’을 깨닫고 하곤 하니까. 누가 그에게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일찌거니 자신의 ‘잣대(Ego)’를 부숴버린 그에게. 그의 가르침처럼 은은한 향을 담은 산 모과를 가득안고 하산(下山)을 하려니 마음은 득도(得道)를 한 기분이다.

좋은 사람과 만난다는 건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백발이 희끗하게 브리지로 들어 있는 로맨스그레이의 전형 '문(범두)교수'와 그 가족.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이 총무'님, 복잡한 회사 일로 머리칼이 많이도 상해 버린 '성 사장님(두피 재생술 수련중)'내외분, 언제나 홀로인 '노대영'님. 정말 팍팍한 세상살이에서 쉬이 만나지 못할 산소 같은 분들이시다. 헤어지기가 너무 섭섭해 작은 선물이라도 장만해야 했다는 ‘류영자’ 회원님. ‘님’께서 전해준 온훈(蘊薰)한 마음은 당신께서 주신 쿠션보다 백배 천배 포근했답니다. 이틀간의 장도에 지칠만한 시간인데도 누구 한사람 싫은 기색 없이 진주의 ‘병실(허향련 여사)’까지 문안 해 주신 여러 ‘님’들의 앞날에 영광 있으라.

 축복의 비여 내려라! 소나기로 쏟아져라!  홍수로 범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