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바스

동경견문록

백낙주 2010-10-23 (토) 18:39 조회:894

09/29 - 10/04 에 딸과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거창한 제목을 보고 놀라신 분들도 계시겠죠?
여행 중 남편에게 매일 매일을 되는 대로 적어 보냈더니
동방견문록보다 더 재미있고 눈 앞에 선하다는 lip service를 받아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전 자칭 딸의 road manager였습니다.
딸의 GRE시험에 제가 동행을 자처했는데
서울에 떨어져 있는 딸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까요.
실은 딸을 위해 이렇다 한 일은 없고, 혼자 실컷 돌아 다니기만 했는데도
제 딸은 엄마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전자전으로 이 또한 lip service일지도 모릅니다.

무려 15통의 메일을 보냈지만 host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답장 또한 몇 장 받지 못하여 실망도 했지만,
한 편으론 이전에 저에게 기꺼이 host를 해 주셨던 분에게 감사편지를 보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또 host를 할 수 있든 아니든 답장을 보내는 것이 host를 청하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guide book에 있는 교통지도를 외우다시피한 것이 도움이 되어
suica(교통카드)만 들고 발길 닿는 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Servas를 통한 여행도 있었고 제 기억 속에만 있는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해
장황하지만 날짜별로 적어 보았습니다.

09/29
도착하자마자 이태리여행으로 host를 못 해 미안하다는 이시와다 요시코상을 만났습니다.
60대의 단아한 분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셨지만 한국은 아직 못 가 봤다고 합니다.
역시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일까요?
딸의 시험장에 혼자 사전답사를 갔는데 물어물어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쉽게 찾을거라 너무 자신만만해 했나 봅니다.
역에서 꽤 멀긴 했어도 큰 도로에 있는 빌딩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저녁은 딸이 시간을 아끼고 싶어해 저희가 묵는 comfort hotel에 있는 편의점도시락으로 해결하였습니다.
한 달 동안 host를 구하지 못 해 포기하고 hotel site를 여기저기 뒤지다시피하여
가격과 숙박후기를 보고 이 호텔로 정하였는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만족했습니다.
실내는 깔끔했고, 전망도 트였고, 역이 바로 옆에 있으며 아침식사는 숙박비에 포함되고
딱 먹을 만 한 음식만 나오더군요. 인터넷도 잘 되어있었습니다.
딸이 저에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하더군요.

09/30
딸의 첫 번째 시험이 1시여서 전 일찌감치 혼자 츠키지 시장으로 향하였습니다.
비가 제법 많이 왔는데 시장 비닐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비를 간간히 맞는 것도 새로웠습니다.
색 입히지 않은 명란젓과 자연산 송이가 제 눈길을 끌더군요.
서양인들이 많았으며 갖가지 수산물이 풍성한 시장이기도 했습니다.
아침식사 후여서 츠키지에서 초밥을 먹지 못한 아쉬움이 컸습니다.
아사쿠사로 발길을 돌렸는데 비가 많이 오고 시간도 없어
아사쿠사 상점가만 둘러 보았습니다.

딸을 시험장에 데려다 주고 Rosemairie상을 시험장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일본에서 불편한 것 중의 하나는 커피숍에 흡연구역이 오픈되어 있어서
커피향은 어디로 간 데 없고 담배냄새로 곤욕을 치른다는 겁니다.
제가 이미 숙소를 다 정하고난 후 host를 해 주겠다고 연락을 해 그 댁에 묵을 순 없었지만
차 한 잔 나눌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분으로 일본인과 결혼해 장성한 자녀를 둔, 소박하고 따듯함이 풍겨나는 분이었습니다.
주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딸은 시험 때문에 먹는 데 별 관심이 없어 오늘도 편의점도시락으로 저녁을 해결하니
속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어미로서 맛있는 거 먹겠다고 혼자 나갈 수도 없고
딸아이의 공부하는 뒷모습만 바라보다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10/01
일찍 check out을 하고 짐을 맡긴 후
전날 인터넷으로 확인 한 3개의 시립 도서관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건물 5층에서 내리니 바로 도서관입니다.
출입구도 없고 이용객을 체크하는 창구도 없었습니다.
좌석의 형태도 위치에 따라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서 개개인의 독서취향에 따라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어 인상깊었습니다.
복층구조로 6층은 아동코너이며 각층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책읽기에 여념이 없더군요.
딸과 6시에 만나기로 하고 우에노 공원 안에 있는 국립 서양 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미술관은 한적하여 천천히 돌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미술관은 로댕의 작품이 많기로 유명하며 3점은 미술관 입구에 전시 되어있습니다.
일본의 한 기업인이 유럽 각지에서 구입한 수천 점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모네의 “수련”도 유명하지만 반 고흐의 “장미”가 제 머리 속에 내내 남아 있습니다.

점심도 먹을 겸 긴자를 가 보니 과연 일본 건축순례지라 할 만큼 특색 있고 다양한 빌딩들이 솟아 있었습니다.
들어가 볼 엄두도 나지 않는 유명브랜드숍하며,
여자들(거의 30대 이상)의 청담동며느리 패션에 버금가는 은은하고 세련된 모습에 눈이 바쁩니다.
“그래. 쇼핑은 못 하지만 맛있는 스시라도 먹자”하고 미츠코시 백화점 식당가에 올라갔습니다.
츠키지스시라는 식당 밖 의자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옆에 중년부인이 저처럼 혼자 앉더군요.
용기를 내어 외국인이라서 생선 이름도 잘 모르니 함께 식사해도 괜찮으시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시어 테이블을 마주 하고 앉았습니다.
제가 일본에 온 손님이라며 맥주를 주문해 주면서 생선 이름부터 맥주를 맛있게 따르는 법,
2년 연속 부탄 트레킹을 다녀온 얘기까지 초밥만큼 고소하고 맛있는 얘기가 슬슬 흘러 나왔습니다.
히로코상은 70세의 곱게 나이든 전형적인 일본 주부모습인데
독신이라고 하면서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다고 강조를 합니다.
다리가 힘이 있는 동안엔 먼 곳을 가고
다리에 힘이 빠지면 그때 한국을 갈 거라고 하시니 참 재미있으신 분이죠!
제 엉성한 일본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히로코상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걸 보면
아마도 나이를 넘어서서 서로 feel이 통한 것 같습니다.
저에게 차 한 잔 대접하겠다고하셔서
히로코상이 시내에 나오면 항상 들른다는 Wako라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제가 안 쪽자리를 권해드렸더니 한국사람은 예의가 바르다며 일본은 이젠 그렇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소시민의 국위선양!!!
지배인이 인사를 하자 절 어떻게 만났고 어떤 사람인지 얘기하면서 케잌은 뭘 먹을 거냐 하시더군요.
저야 식사 후 케잌을 먹는 일이 거의 없으니 아무거나 괜찮다고 했더니
지배인이 큰 쟁반에 각종 조각 케잌을 담아 와 고르라고 합니다.
제가 고른 것은 몽블랑이었는데 저에겐 이름도 맛도 처음인 케잌이었습니다.
딸은 먹어 본적이 있다고 하니 제가 촌스러운거겠죠.
케잌을 먹으며 이름에 관심을 둔 적은 더더구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담배연기 한 점 없는 곳에서 히로코상과 유쾌한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덧 날이 어둑해졌습니다.
낯선 곳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났다는 건 분명 행운이겠죠!

딸을 데리고 host를 해 줄 사찌코상의 사무실이 있는 동경역으로 갔습니다.
사찌코상은 coordinator로 제가 첫 번 째로 연락 한 분이었데
처음엔 일 때문에 host를 할 수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가
9월중순에 host를 해 줄 수 있다고 메일을 다시 주었습니다.
동경Servas는 연령대가 높아 활동이 많지 않고 일 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메일을 주고 받을 때는 사무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부드러운 사람임을 식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찌코상은 한국에 관심이 많아 우리말도 배워 열심히 저희와 우리말로 대화하려고 하고
발음도 일본사람같지 않게 정확하더군요.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우리의 의견도 열심히 물어 봤습니다.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옆 테이블의 남자들이 저희 테이블로 넘어지는 바람에
제가 간장세례를 받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괜찮다는 말과 짐에서 주섬주섬 옷을 꺼내 갈아 입는 걸로 일단락.

10/02
부엌일에 익숙치 않은 사찌코상의 핫케잌이 일품이었던 아침 식사 후
딸은 집에 남기로 하고 사찌코상과 저는 지유가오카로 향했습니다.
평소 소품과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저에겐 안성맞춤인 거리입니다.
작고 에쁜 상점이 즐비한 거리로 제 경제력으로 쇼핑이 그나마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그래도 간이 작아 비싼 물건은 못 사고 사찌코상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겠다고
엄포한대로(?) 프랑스식당에서 양껏 먹었습니다.(와인을 살 베짱은 안 되더군요.)
점심 식사 후 헤어지자는 제 제안에 사찌코상은 록본기에 있는 산토리미술관으로,
전 모리미술관으로 가기로 했는데 사찌코상이 보려던 전시가 이직 시작 전이어서
함께 모리미술관으로 올라갔습니다.
모리미술관은 모리타워 꼭대기에 있어서 전망대에서 동경 시내를 쭉 둘러본 후
사찌코상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sensing nature"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자연지각력을 생각하는 3인의 설치미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너무나 독창적이었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다시금 생각케 하는 아주 특별한 전시였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제가 헤드폰으로 작품설명을 들으니 어느덧 보는 수준이 아닌 감상하는 수준이 되더군요.
사찌코상은 저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리미술관의 서재는 우리의 발상을 전환하는 곳이기도 하니 꼭 가보시기 바랍니다.
회전초밥으로 저녁식사 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동네 한 바퀴!

10/03
집주인의 허락하에 제가 준비한 찐 감자와 인근 초등학교의 운동회 소리로 아침식사.
딸과 함께 이케부쿠로에 있는 guest house인 기미여관으로 갔습니다.
전차를 바꿔 타는 도중 그만 딸과 헤어지게 되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기계치인 저는 로밍한 폰조차도 쓸 줄을 몰라 연락이 두절되어
딸과 헤어진 역으로 가보니 딸은 온 데 간 데 없더군요.
할 수 없이 여관이 있는 이케부쿠로역으로 갔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역에서 딸을 만날 수 있었는데,
딸은 제가 다음역에서 기다릴 거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딸이 어린 애도 아니니 어떻게든 만나겠지 생각했지만
다음 날 있을 시험에 지장을 주면 어쩌나 걱정이 앞 섰거든요.
기미여관은 역에서도 가깝고 깨끗하고 직원들도 친절했으며
특히 주인(중년 신사)의 꽃꽂이 솜씨가 여기 저기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딸은 예약할 때 화장실과 샤워실이 공용이라는 말에 좀 난색을 표하더니
그런 모든 걱정이 기우임을 알게 되자 흡족해 하였습니다.
로비에는 간단히 식사를 할 수 있는 시설과 각 자의 음식을 둘 수 있는 냉장고, 공동탕,
그리고 study room도 있었습니다.
직원의 말로는 엔고이전엔 비성수기에도 예약하기 힘들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간단한 점심 후 딸은 study room으로, 전 국립 신미술관의 고흐전을 보러 갔습니다.
전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일요일 오후여서 관람객이 많았지만
일본의 질서정연함과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조용히 고흐전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미술관은 역과 바로 연결이 되어 있고 로비에 관람객이 쉴 수 있는 등 긴 의자가 정원을 향해 있어
관람객을 배려한 공간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신오차노미즈역에서 하차하여 진보쵸까지 유유자적 걸으며 몇 군데의 고서점을 기웃거렸습니다.
혹시 제가 좋아하는 작고 예쁜 꽃본이 담긴 수 놓는 책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결국은 새 책으로 구입.
종일 여관에 있는 딸을 위해 고로케 몇 개도 잊지 않았습니다.

10/04
딸의 두 번 째 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딸이 시험보는 동안 동경예술대학 미술관을 가려던 예정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오늘이 월요일임을 깜박했거든요.
국립 신 미술관은 화요일이 휴관이어서 바꿔가야지 해 놓고 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행할 때 저의 큰 장점은 걷는 걸 마다하지 않은 겁니다.
미술관은 접어두고 걸을 수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전차를 타고 아오야마잇초메에서 내려 오모테산도까지 거리구경을 하였습니다.
가는 길에 우동집이 있어 “그래도 일본에 왔으니 우동 한그릇” 하고 들어갔는데
어찌나 짜고 맛이 없던 지 절반은 남기고 후다닥 나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모테산도는 잘 자란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넓직한 길에
유명브랜드점이 한 눈에 보이는 세련된 거리였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아이쇼핑하기엔 안성맞춤인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살 수 있는 것은 700엔숍에서 패션시계, 무인지루시에서 tea candle정도랍니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개성이 강한 빌라와 작은 숍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시험장 근처 커피숍에 가니 환한 표정으로 나타난 딸.
시험을 잘 봤다는 딸의 말에 저의 모든 피로가 가신 걸 보면 전 분명 속물엄마입니다.
딸의 재잘거림을 듣다보니 어느새 Rosemarie상이 추천해준 이이다바시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양쪽에 즐비한 상점은 보통의 일본거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좁디 좁은 골목을 들어서니
이끼긴 도로블럭이며, 예약하지 않으면 문도 안 열어줄 것 같은 작은 식당들,
예쁘게 가꾼 소박한 담장의 꽃들,
어느 것 하나 제 눈길이 가지 않는 것이 없는 옛 정취가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눈으로만 담아두기만 하는 제게,
이 모든 소소한 것들을 사진에 담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곳입니다.
점심은 서양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일식당을 갔는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건 없다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여관에서 짐을 찾은 후 공항으로 여유있게 출발했음에도 예기치 않던 사소한 일들로
이륙 5분전에 탑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시간이 정해졌을 때는 충분한 여유를 두어야겠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선진국이 어떤 나라인지 여행을 하면 피부로 와 닿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충실히 준비했느냐에 따라 여행의 묘미도 달라지겠죠.
사람과의 만남 또한 제 마음을 따듯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여행의 즐거움을 몸과 마음은 다르게 느끼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재충전하라는 속삭임이 들립니다

jinjunKIM 2010-10-24 13:36	와우! 멋진 여행 하셨네요! 히로코상 사찌고상 한국에 오시면 우리에게도 연락 주세요!ㅎㅎ

JongmanBae 2010-11-11 09:31	낙주씨, 연말 모임에 오셔서 여행 이야기를 해주이소...